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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운명을 함께하는 사찰 흥국사

기사승인 2011.10.27  12:3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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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0일의 기도로 지어진 사찰 …800여 점 유물 전시 불법보다 호국을 우선으로 창건…임란 땐 의승수군 활약

 

◇ 여수시 중흥동 영취산자락에 위치한 흥국사는 중생의 구제를 위해 100일이나 되는 긴 시간 동안 기도를 드리며 지어졌다는 일화가 있다.


한 덩어리 거대한 기계장치가 모아진 공장지대를 벗어난지가 몇 분 전으로, 산허리 한 번 돌았을 뿐인데 이리 멋진 숲과 한 덩어리 된 고찰이 있을 줄이야! 

흥국사를 만나보는 여행객들이 놀라는 첫 느낌이다. 얼마 전까지 절 입구에 옛 삼일면의 생활 중심이었던 중흥마을이 있어 활기가 넘쳤으나 지금은 이주가 진행되고 있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이다.

사람이 잘 살기위해 산업단지가 만들어졌지만 정작 사람이 살아갈 집들이 헐리고 주민이 떠난 자리에는 삭막한 공장들로 채워질 모양이다.

흥국사로 오르는 도로를 따라 아쉬운 마을의 흔적이 끝나는 지점에 산문의 입구가 있다. 

“절이 흥하면 나라가 흥할 것이요 나라가 흥하면 이 절도 흥할 것이다”라고 하여 흥국사라고 이름 짓고 절을 찾는 중생의 구제를 위해 1,000일이나 되는 긴 시간을 기도를 드리면서 절을 만들었다는 일화는 이 절의 가치를 한껏 올려준다.  

상쾌한 숲 내음과 함께 시작되는 입구의 일주문을 지나면 가람에 배치된 건축물과 형상들 하나하나가 깊은 사유를 통해서 만들어진 의미와 상징을 담고 있다.

흥국사의 대웅전은 끝없는 욕망과 고통으로 채워진 인간세상이란 바다에서 피안의 세계로 데려다 줄 선박으로 반야용선이란 배로 형상화 되었다.

그래서 대웅전 네 귀퉁이마다  거북과 용, 꽃게와 같은 바다 생물이 조각되어있다. 이런 이유로 흥국사 대웅전 앞에는 탑이 보이질 않는다. 바다 위에 탑을 세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지 대웅전 앞 석등은 돌거북이 짊어지고 있다.   

전라남도 여수시 중흥동 영취산(靈鷲山)에 있는 흥국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인 화엄사(華嚴寺)의 말사이다. 흥국사는 고려 명종 25년(1195년) 보조국사가 창건하고 조선조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으로 소실된 후 인조(1624년)때  계특대사가 중건하였다고 전해온다.

보조국사는 국가가 바로 되고 승가가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는 것을 염원하였는데, 흥국사도 이러한 보조국사의 사상과 신앙에 의해서 창설된 사찰로 임진왜란 시에는 의승군 400여명이 활약하여 호국 불교의 성지로 알려지기도 하였다.

절 안에는 보물 제396호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홍교(보물 제563호), 노사나불괘불탱(보물 제1331호), 수월관음도(보물 제1332호), 십육나한도(보물 제1333호), 목조지장보살삼존상(보물 제1566호), 목조석가여래삼존상(보물 제1550호), 대웅전 후불탱화(보물 제578호), 강희 4년명 동종(보물 제1556호)등 9개의 보물과 원통전(전남유형문화재 제45호), 팔상전(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58), 삼장보살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99호)가 있고 의승수군유물전시관에는 800여점 이상의 유물이 있는 볼거리도 많다.

나라와 사찰이 공동운명체라는 흥국의 사상은 비보사찰로서 종교의 법력으로만 기대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병역의 의무와 상관없이 해전에 참가했던 비정규적 수군 병력은 토병(土兵)과 포작(鮑作), 노예 등 다양하였다.

그밖에도 당시 연해 지역에 거주하던 전직 관료와 무과 출신 유생들과 승려 등 다양한 계층의 장정들이 전투에 참전하거나 해안 지역을 무대로 유격전을 전개하였는데, 그중에서 가장 눈부신 활약을 보인 것이 흥국사 등의 승려들로 구성된 의승수군이었다.

나라의 안정과 융성을 기원했던 기도처로서, 불법보다 호국을 우선으로 창건된 흥국사의 면모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이러한 의승수군은 1894년 갑오경장으로 전라좌수영이 폐영되면서 해체될 때까지 호국 승병으로서의 역할을 다하였다.

지금은 입구의 매표소를 지나면 일주문을 바로 만나게 되는데 옛날에는 일주문이 없이 공북루가 먼저 나타났다. 우리나라 사찰에서 보기 어려운 이런 구조는 공북루는 일종의 성문으로서 기능을 했기 때문이다.

◇ 대웅전 문고리를 잡고 기도하는 사람은 삼악도(죽어서 가는 고통의 세계)를 면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때문에 흥국사를 찾는 사람들은 문고리부터 잡는다.

예전에는 남쪽 성문을 진남이라 하고 북쪽 문을 공북이라 했는데 이는 임금이 북쪽에 있으므로 예를 갖춘다는 뜻이다. 이렇듯 성문이 사찰의 일주문처럼 있었던 것은 의승수군이 있어 군사체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송광사 대웅보전 문살의 표본이 되었다는 흥국사의 아름다운 대웅전의 문살 위에는, 매우 큰 문고리가 달려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이는 대웅전을 다시 중건할 때 절집을 세웠던 스님들께서 건축을 마치고서 천일동안을 기도를 드리며 대웅전 문고리를 잡는 사람들에게 삼악도(불교에서 악인이 죽어서 가는 고통의 세계)를 면하게 해 달라고 기원 드리고 오랫동안 문고리가 전해지도록 크게 만들었기 때문이란다.
흥국사를 찾는다면 맨 먼저 대웅전의 문고리 먼저 잡아야 될 일이다.  


 

데스크 webmaster@yeosunews.net

<저작권자 © 여수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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